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2세기 고려는 문벌 귀족 사회의 절정기를 지나 심각한 내부 모순에 직면했다. 특히 인주 이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외척의 전횡은 왕권과 국가 기강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모순은 1126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을 통해 폭발했고, 이는 문벌 귀족 세력 자체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자겸의 난 진압 이후에도 문벌 귀족들이 주도하는 근본적인 정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개경 중심의 기득권 세력과 서경 중심의 혁신 세력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두 세력의 충돌은 고려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결국 1135년에 승려 묘청을 중심으로 서경에서 일어난 천도 운동은 단순한 천도 문제를 넘어, 고려의 지배 이념(유교 대 불교)과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사대 대 자주)을 둘러싼 심각한 이념적 갈등이었다. 서경파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되살려 북방 민족을 정벌하자는 자주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이 두 사건은 고려 중기의 문벌 귀족 체제를 뒤흔들었으며, 특히 묘청의 난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승리로 종결되면서 고려 사회의 보수화와 문신 중심의 통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결국 무신 정변의 배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왕권을 위협한 외척의 전횡: 이자겸의 난 (1126년)
이자겸의 난은 문벌 귀족 사회의 권력 독점과 폐쇄성이 낳은 가장 극단적인 사례였다. 인주 이씨 가문 출신인 이자겸은 네 명의 딸을 예종과 인종에게 출가시켜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그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국정을 전횡하고 자신의 친인척을 주요 관직에 배치하여 권력을 사유화했다. 그의 권세는 왕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이는 중앙 관료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자겸이 궁궐 내에 사설 무장 세력을 배치하는 등 무력을 과시하면서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자겸의 권력 남용은 결국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세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1126년 인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이자겸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에 이자겸은 무장 척준경의 군사를 동원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자겸과 그의 심복인 무장 척준경이 일으킨 반란은 왕궁을 포위하고 불태웠으며, 왕을 자신의 사저로 옮겨 사실상 감금하는 초유의 사태를 빚었다. 이자겸은 스스로 '국공'이라 칭하고, 나아가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심까지 드러냈다. 이는 고려의 건국 이념이었던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였으며, 고려 역사상 전례가 없는 외척의 권력 남용 사례였다.
결국 인종은 이자겸 세력 내부의 분열을 이용했다. 인종은 척준경의 동생과 아들을 살해하고, 척준경에게 이자겸을 제거할 것을 설득하는 이간책을 썼다. 문벌 귀족 세력 내의 알력과 이권 다툼을 정확히 파고든 전략이었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배신하고 그의 세력을 공격하여 이자겸을 사로잡았다. 이후 척준경 역시 숙청됨으로써 이자겸의 난은 막을 내렸다. 이 난으로 인해 문벌 귀족 사회의 권력 구조는 큰 타격을 입었고, 수도 개경과 왕궁이 파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은 극에 달했다.
개경 대 서경의 이념 대립: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35년)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때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며 등장한 인물이 승려 묘청이었다. 묘청은 서경(평양)의 지덕이 융성하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왕권이 회복되고 금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당시 사회의 불안정을 해소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인종의 의도와 맞아떨어졌으며, 개경파에 반감을 가진 정지상 등 서경 출신 문신들이 대거 합류했다.
묘청의 주장은 단순히 수도를 옮기는 지리적 문제가 아니라, 당시 고려 사회의 주류인 개경파 문벌 귀족이 지향하던 유교적 현실주의와 사대 외교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묘청은 '금나라를 정벌하고 황제국을 칭하자'는 자주적인 대외 정책을 주장했으며, 이는 거란과의 전쟁 이후에도 약체화된 금나라에게 사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개경의 보수 세력(김부식 등)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서경파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으로 돌아가 고구려의 북진 기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북방 개척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찾으려는 움직임이었다.
또한 묘청은 유교의 합리주의 대신 불교와 도참사상에 기반한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왕의 행차를 기다렸으나, 김부식 등의 개경파는 서경 천도의 비합리성을 지적하고 묘청이 왕을 현혹하여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며 왕의 결심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개경파의 논리는 유교적 경전과 명분론에 기초하여 묘청 세력을 '비합리적인 반란 세력'으로 몰아갔다.
결국 인종이 천도 계획을 철회하고 서경파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자, 묘청은 서경에서 '대위국'을 선포하고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감행했다.
개경파의 승리와 고려 사회의 보수화
묘청이 일으킨 서경 천도 운동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파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김부식은 유교적 대의명분을 내세워 반란군을 무력으로 토벌했다. 김부식은 이자겸의 난을 겪은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설득하여 반란 진압을 주도함으로써 개경 문벌 귀족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묘청의 난은 1년여 만에 평정되었고, 이 과정에서 묘청과 정지상을 포함한 서경 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묘청의 난 진압을 '보수 대 혁신', '유교 대 불교', '사대 대 자주', 그리고 '개경 대 서경'이라는 네 가지 대립 구도가 충돌한 사건으로 평가한다. 특히 신채호 선생은 이 사건을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으로 꼽으며, **민족사적 자주 의식이 보수적인 사대주의에 패배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난의 결과는 고려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부식의 개경파 문벌 귀족이 최종 승리하면서, 고려의 지배 이념은 유교적 보수주의로 더욱 강화되었다. 서경을 중심으로 한 자주적 북진 의식은 크게 위축되었고,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가 공식적인 국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고려 사회의 활력과 개혁 정신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묘청의 난은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최초의 급진적인 개혁 운동이었으나, 그 좌절은 문벌 귀족 중심의 통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을 거치며 왕권은 외척의 간섭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동시에 문벌 귀족 전체가 독점하는 권력의 벽은 더욱 높아졌다. 이자겸의 난은 문신 귀족 내부의 분열을, 묘청의 난은 개경 중심의 문신 사회와 지방 및 신진 세력 간의 간극을 확인시켜주었다. 결국 이러한 문신 사회의 경직성과 무신에 대한 차별은 이후 무신 정변이라는 더 큰 정치적 격변을 예고하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