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운명을 가른 연합과 대립: 신진사대부, 신흥 무인 세력, 그리고 권문세족


14세기 후반, 고려 말의 정치 지형은 세 개의 주요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첫째는 오랜 기간 국정을 농단해 온 권문세족이었고, 둘째는 외적을 격퇴하며 군사적 실력을 입증한 신흥 무인 세력인 최영과 이성계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도덕정치와 개혁을 부르짖던 새로운 지식인 집단인 신진사대부였다.
이 시기는 고려의 운명을 결정짓는 격변기였다. 신진사대부는 자신들의 개혁 이념을 현실 정치에 실현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신흥 무인 세력, 특히 이성계와 손을 잡았다. 이들의 연합은 고려의 사회 모순을 심화시킨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 왕조를 유지하려는 온건파 사대부와 새 왕조 건국을 주장하는 급진파 사대부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개혁 연합은 곧 분열을 맞이한다. 이 정치적 갈등은 결국 이성계의 결정적인 군사 행동인 위화도 회군을 통해 종결되었고, 고려 500년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세력 재편과 권문세족의 몰락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고려는 우왕과 창왕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왕권이 크게 흔들렸다. 이 공백을 틈타 권문세족은 다시 국정을 장악하려 했으나, 강력하게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적 대의명분론과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권문세족의 불법적인 토지 겸병과 노비 사유화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들은 권문세족의 토지 제도 문란이야말로 국가 재정을 파탄내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다.
신흥 무인 세력의 핵심인 최영과 이성계는 군사적 실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들은 권문세족의 전횡을 군사력을 통해 제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공민왕 사후 정국을 장악했던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은 우왕의 재위 기간 동안 다시 득세하며 국정을 혼란에 빠뜨렸으나, 이는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이 연합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직전,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는 연합하여 권문세족의 상징적인 존재들을 제거했다. 특히 최영은 공민왕의 개혁을 계승하여 이인임 일파를 숙청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고려를 지배했던 권문세족은 정치적 기반을 상실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고려의 권력은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 연합 세력으로 급격히 이동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진사대부는 무인 세력의 힘을 빌려 정권을 장악했고, 무인 세력은 사대부의 도덕적 정통성을 확보하여 권력을 정당화하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성립되었다.

개혁의 핵심: 과전법과 신진사대부의 주도권 확보

권문세족이 몰락한 후, 신진사대부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이 추구했던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이 개혁의 핵심은 토지 제도의 개혁이었다. 권문세족의 불법적인 토지 겸병은 국가의 수조지(조세를 거둘 수 있는 땅)를 고갈시켜 국가 재정을 극도로 악화시켰으며, 농민들을 노비 또는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적 모순의 근원이었다.
신진사대부는 토지 제도의 문란을 해결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며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과전법의 제정을 추진했다. 과전법은 기존의 불법적인 대농장을 혁파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 후 관직의 등급에 따라 관리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법이 시행되면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이 완전히 해체되는 동시에, 토지에서 조세를 거두지 못했던 국가 재정이 회복될 수 있었다.

과전법 시행을 주도한 인물은 정도전, 조준 등 급진 개혁파 사대부였다. 이들은 성리학적 원칙에 따라 토지 사유를 엄격히 제한하고, 백성들에게 균등한 토지를 보장하려 했다. 1391년 과전법이 최종적으로 공포되면서, 신진사대부는 개혁 세력으로서의 주도권을 확고히 다졌다. 이 토지 개혁은 신진사대부가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개혁을 방해하려는 권문세족의 잔존 세력을 진압하며 사대부들의 개혁을 뒷받침했다. 특히 이성계는 토지 개혁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수행했다.

개혁 세력 내부의 분화: 급진파와 온건파의 대립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토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의 연합은 강력했지만, 그들 내부에는 고려 왕조의 운명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차이가 존재했다. 이 견해차이는 개혁 세력을 급진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온건 개혁파는 정몽주, 이색 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성리학적 이념과 도덕 정치를 추구했지만, 고려 왕조 500년의 역사를 존중하고 충절을 중요시했다. 이들은 과전법 등 사회 개혁은 추진해야 하지만, 고려 왕조 자체를 뒤엎고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정몽주는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을 지키며 이성계 일파의 왕조 교체 시도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반면, 급진 개혁파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고려 왕조가 이미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타락했고, 권문세족의 잔재가 남아있는 한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들은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고려 왕실을 폐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역성 혁명을 주장했다. 급진파는 이성계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왕조 교체를 기정사실화하려 했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은 1392년까지 이어지면서 고려 말 정국의 주된 긴장 요소가 되었다. 급진 개혁파는 이성계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반면, 온건 개혁파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왕실과 기존 관료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립했다. 이 갈등의 향방이 곧 고려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짓는 열쇠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과 권력 장악

고려의 대외 관계 역시 이 시기의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명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낸 후, 명나라는 철령 이북 지역이 원래 명나라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며 철령위 설치를 통보했다. 이는 고려의 북방 영토에 대한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이에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최영은 명나라의 요구를 묵과할 경우 고려의 자치권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무력으로 명나라에 맞설 것을 주장했다. 이 때 우왕은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성계를 도통사로 임명하고 요동 정벌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했다. 그는 소위 4불가론을 내세워 명나라와의 전쟁이 국익에 해가 되며, 특히 장마철에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영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이성계는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게 되었다.

1388년,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했다. 이는 이성계가 최영과 우왕의 정치적 명령을 거부하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수도 개경으로 돌아온 정치적 쿠데타였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 말 정치사를 완전히 뒤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회군 후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켰으며, 창왕을 옹립했다가 다시 공양왕을 세우는 등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성계는 고려의 군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으며, 급진파 사대부들은 이성계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 국정을 전횡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 왕실을 지키려던 최영과 온건 개혁파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새 왕조 건국을 향한 길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권력의 대전환: 무신 정변과 무신 정권의 성립 및 정치 기구 변화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