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 이념의 완성: 고려 성종의 유교적 시스템 정비와 2성 6부 체제 확립
고려 6대 왕 성종의 재위기는 광종이 무력으로 확립한 전제 왕권을 유교적 이념과 제도로 다듬어 중앙 집권 체제를 최종적으로 완성한 시기였다.
성종은 즉위 후 유학자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지나친 불교 행사 축소와 유교 기반 통치를 국정의 기본 방향으로 삼았다.
성종은 이 시무 28조를 바탕으로 중앙 정치 기구를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2성 6부 체제로 정비했다. 이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며 관료들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분담하는 합리적인 통치 시스템이었다.
또한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중앙에서 지방관인 목사를 파견함으로써 지방 호족 세력을 중앙의 통제 아래 두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성종의 개혁은 과거 제도를 통해 등용된 신진 유교 관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고려를 명실상부한 문치주의 국가이자 통일된 행정 체계를 갖춘 국가로 발전시켰다.
시무 28조의 채택과 유교적 통치 이념 확립
성종은 즉위 초기부터 광종 시대의 공포 정치와 무리한 숙청으로 인해 불안정했던 정국을 수습하고, 안정적인 통치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때 유학자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는 성종의 이러한 정치적 요구에 정확히 부응하는 정책 건의서였다.
시무 28조는 유교적 왕도 정치의 실현을 핵심 목표로 삼았다. 주요 내용은 광종 시대에 과도하게 성행했던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축소하고, 그 비용을 민생 구휼과 국가 재정 확충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승로는 불교의 숭상은 개인의 수양에 그쳐야 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유교 윤리에 있어야 함을 역설했다.
특히 시무 28조는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를 강조했다. 태조 왕건 이후 지방 호족들이 사실상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효율적인 세금 수취와 행정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종은 이 건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유교 이념을 통치 이념으로 확정하고, 본격적인 제도 개혁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유교적 통치 이념의 확립은 능력 있는 문신 관료들의 등용을 촉진했고, 성종은 이들을 통해 관료 체계를 완성해 나갔다. 시무 28조는 단순한 제안을 넘어, 약 500년간 지속될 고려 왕조의 통치 철학과 시스템의 설계도 역할을 수행했다.
중앙 행정 시스템: 2성 6부 관제 확립과 관료 제도 정비
성종은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한 후, 이를 뒷받침할 중앙 행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성종 때 완성된 중앙 관제는 2성 6부 체제로 대표된다. 2성은 내사문하성과 상서성이며, 내사문하성은 최고 정책 결정 및 심의를 담당했고, 상서성은 그 정책을 집행하는 총괄 기구였다. 이 두 성이 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분리하면서도 상호 견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6부는 상서성 아래에 설치되어 이, 병, 호, 형, 예, 공의 기능을 나누어 맡았다. 각 부는 오늘날의 행정 부처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로써 국가 행정 업무가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담되었다. 이는 기존의 호족 중심의 정치 운영을 법과 제도에 의한 전문 관료 중심의 행정으로 전환하는 핵심적인 조치였다.
성종은 2성 6부 외에도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담당하는 중추원, 국가 재정의 출납과 회계를 맡은 삼사, 그리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고 정책에 대한 간언을 하는 어사대 등의 다양한 관서를 정비했다. 특히 어사대는 왕권의 독주를 막고 관료들의 기강을 확립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는 성종 통치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중앙 관제 정비는 당나라의 삼성육부를 참고했으나, 고려의 현실에 맞게 내사문하성의 권한을 강화하고 중추원 등의 독자적인 기구를 추가하는 등 독창적인 요소도 가미했다. 이 2성 6부 체제는 고려 중기까지 국가 통치의 근간으로 유지되었다.
지방 통치 강화와 교육을 통한 통치 기반 확대
성종은 중앙 관제 정비와 더불어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직접적인 통제력을 강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성종 2년에는 전국 주요 거점에 12목을 설치하고, 중앙 관료를 목사로 파견했다. 목사는 해당 지역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하며 지방 호족들의 사적인 권한을 흡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호족들을 향리라는 하위직으로 편입시키고, 중앙 집권을 지방으로 확대하는 결정적인 조치였다.
12목 외의 지역은 여전히 호족이나 향리들이 통치하는 속현의 형태로 남아있었으나, 목사가 파견된 주현을 중심으로 점차 지방 행정의 통일성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성종은 지방의 군사력을 재편하여 중앙군인 2군 6위 아래에 편제시키면서 호족의 사병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수순을 밟았다.
또한, 성종은 유교적 통치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교육 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중앙에 국자감을 정비하여 고위 관료 양성 기관으로 격상시키고, 지방 12목에도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교 교육을 보급했다. 이는 지방의 젊은이들에게 유교적 소양을 심어주고, 과거 제도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지방 세력까지 포용하는 통치 시스템을 완성하려는 의도였다.
성종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 고려가 거란의 침입과 같은 외부 위기를 극복하고 동아시아의 안정된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필요한 견고한 행정력과 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