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방파제: 고려의 북진 정책과 거란과의 3차 전쟁을 통한 국방 시스템의 전환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북진 정책을 국가의 핵심 기조로 삼았다. 태조 왕건은 서경(평양)을 중시하고 북방 개척을 추진했지만, 10세기 후반 북쪽에는 강력한 거란족의 요(遼)나라가 발흥하며 고려와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고려의 전성기라 불리는 성종 이후, 거란은 총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입을 감행했다. 이 전쟁은 고려에게 위기였으나 동시에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와 국방 시스템을 시험하고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서희의 외교 담판을 통해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획득한 사건은 고려의 외교력과 국방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쾌거였다. 이후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시작된 2차 침입과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마무리된 3차 침입은 고려의 군사적 역량을 입증했다.
거란과의 전쟁을 겪으며 고려는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2군 6위를 재정비하는 등 국방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전환했으며, 이는 고려가 자주적이고 안정적인 중세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의 강동 6주 획득 외교
거란은 993년(성종 12년)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입했다. 거란의 침입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가임을 천명하며 북진 정책을 고수하고, 거란 대신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데 대한 군사적 압박이었다. 거란의 소손녕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고려의 영토를 문제 삼았다.
침입 초기, 고려 조정은 거란군의 위세에 눌려 항복을 주장하는 주화론과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주전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때 중신이었던 서희가 자청하여 거란 진영으로 가서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이 외교 담판은 고려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서희는 소손녕에게 고려 역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논리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고려의 국호가 고구려의 '고'를 뜻하고, 수도도 고구려의 옛 땅에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고려가 거란과 직접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국경 사이에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며, 만약 그 땅을 확보하여 국경이 맞닿으면 거란에 사대할 의향이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는 거란의 명분을 인정하면서도 실리를 취하는 고도의 외교 전략이었다.
결국 서희의 외교적 승리로 고려는 군사적 충돌 없이 압록강 동쪽의 흥화진, 용주 등 6개의 주를 확보했다. 이를 강동 6주라 부른다. 강동 6주 획득은 고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가져왔으며, 이후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서희의 외교 담판은 고려가 외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실질적인 국익을 확보한 자주적 외교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2차 및 3차 침입: 위기와 극복, 강감찬의 귀주 대첩
거란은 1차 침입 이후 고려가 약속했던 송과의 단교를 이행하지 않고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유지하자 다시 침략을 준비했다. 1010년(현종 1년), 고려의 무신인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사건은 거란에게 훌륭한 침략의 구실을 제공했다. 거란의 성종은 강조의 처단을 명분으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2차 침입을 감행했다.
침입 초기,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은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크게 패했고, 강조는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수도 개경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떠나는 몽진을 감행했다. 이때 양규와 김숙흥 등 고려의 장수들이 분전하여 거란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포로로 잡혀가던 수많은 백성을 구출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양규 등은 전사했다.
2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가 거란과의 관계를 명확히 정리하지 않자, 1018년(현종 9년) 거란은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3차 침입을 단행했다. 고려는 문신 출신이었으나 전략가였던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 20만 8천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총력전을 준비했다.
강감찬은 흥화진에 도착한 거란군을 미리 준비된 쇠가죽 끈으로 강을 막아 물을 불리고 매복 공격을 감행하여 거란군의 기세를 꺾었다. 거란군은 보급선이 길어지고 전의를 상실하자 무리하게 개경을 향해 남진을 시도했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
퇴각하는 거란군을 강감찬은 귀주에서 완전히 포위하여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귀주 대첩은 거란의 침략 의지를 완전히 꺾고 고려의 자주권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승리였으며, 고려의 위상을 동아시아에 과시했다.
전쟁 후 국방 및 통치 시스템의 전환
거란과의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겪은 후, 고려는 국방 시스템과 통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편했다. 현종은 전쟁 기간 동안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대규모 사업을 추진했다.
가장 중요한 사업은 국경 지역의 방어력 강화를 위한 천리장성 축조였다. 현종은 1033년부터 1044년까지 압록강 입구에서부터 동해안의 돌산포까지 길게 이어지는 대규모 장성을 축조했다. 천리장성은 거란을 포함한 북방 민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물리적 방어선이 되었으며, 고려의 북방 영토를 확정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군사 제도 역시 정비되었다. 중앙군이 2군 6위 체제로 재정비되었는데, 2군은 왕실 호위 및 친위대 역할을, 6위는 수도 방위와 국경 방어를 담당했다. 이는 성종 때 유교적 관료제로 재편된 중앙 행정 시스템과 더불어 국가 통치 시스템의 군사적 완결성을 높이는 조치였다.
또한 현종은 전쟁 중에 호족 세력이 다시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기 위해 지방 통치 시스템을 재정비했다. 지방관 파견을 확대하고 향리 제도를 더욱 엄격히 통제했으며, 유교를 통한 민심 수습과 교육 진흥에도 힘썼다. 특히 몽진 기간 동안 민심의 중요성을 깨달은 현종은 백성들을 위한 구휼 정책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시스템 전환은 고려가 12세기 중반까지 안정된 왕조를 유지하는 근간이 되었으며, 이후 여진족의 위협에도 대처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탄탄한 국방 시스템을 구축하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