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침입과 70년간의 항전: 삼별초의 투쟁과 자주 의식
13세기 초,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몽골 제국의 침입은 고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최대의 국난이었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약 3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은 고려의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당시 집권자였던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에 맞서 강화도 천도라는 장기 항전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육지에서의 몽골군 공세를 피하고 해상 방어를 통해 정권 유지를 우선시한 조치였다.
최씨 정권의 무력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대몽 항전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최씨 정권이 붕괴하고 고려 왕실이 몽골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며 개경으로 환도하려 하자, 삼별초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대몽 자주 항전을 이어갔다.
삼별초의 항전은 진도와 제주도로 이어지며 약 3년간 지속되었는데, 이는 고려 무신 정권의 잔재인 동시에, 몽골에 대한 투쟁 의식과 자주 국가를 지키려는 민족적 염원이 투영된 마지막 군사 활동이었다.
몽골의 침입과 강화도 천도
몽골은 금나라 정복을 위한 후방 안정화 과정에서 고려에 접근했다. 1219년, 몽골과 연합한 거란족의 잔당이 고려 북방을 침입했을 때, 고려가 몽골에 구원을 요청하고 함께 거란을 격퇴한 사건은 몽골과의 공식적인 접촉의 시작이었다. 이후 몽골은 고려에 과도한 공물과 조공을 요구하며 압박했고,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 국경에서 피살되면서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1231년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의 1차 침입은 고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고려는 귀주성에서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개경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화의를 맺고 몽골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고려는 몽골이 철수한 직후 화의를 파기하고 항전 태세에 돌입했다.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는 1232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는 천도를 단행했다. 최우는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에서 해군력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항전을 계획했다. 이 강화도 천도는 최씨 무신 정권의 안전과 정권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한 조치였으며, 이는 육지의 백성들을 몽골군의 약탈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강화도 천도 이후 몽골은 1232년 2차 침입을 시작으로 약 30년간 총 여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은 매번 개경 환도를 요구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고, 고려의 국토는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육지에서 활동하던 승려 김윤후는 2차 침입 당시 처인성(용인) 전투에서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으며, 5차 침입 당시에는 충주성에서 노비와 천민들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하는 등 육지에서도 치열한 항전이 이어졌다.
대몽 항쟁의 상징, 팔만대장경 조판과 문화적 투쟁
최씨 무신 정권은 강화도 천도 후 군사적인 항전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힘을 빌려 국난을 극복하려는 문화적 투쟁도 전개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팔만대장경의 조판이다.
몽골의 2차 침입으로 인해 초조대장경(11세기 거란 침입 때 제작)이 불타자, 고려는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염원을 담아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약 16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다시 조판했다. 팔만대장경은 8만여 장의 목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불교 경전 목판 중 가장 방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자랑한다. 이는 당시 고려의 놀라운 기술력과 민족적 결집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산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토 회복과 국난 극복에 대한 염원을 담은 역사서의 편찬도 이루어졌다.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는 중국사와 대등하게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여 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취시켰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과 달리, 이 시기의 역사서는 고구려 계승 의식과 북방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표출했다.
하지만 몽골의 끊임없는 침략과 이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는 막대했다. 몽골은 식량 약탈과 인구 포로화를 자행하여 고려의 경제 기반을 파괴했고, 수많은 성곽과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특히 무신 정권이 강화도에 머물며 육지 백성들에 대한 구호 조치에 소홀했던 점은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몽골과의 장기적인 소모전은 결국 고려 왕실과 일부 문신 세력이 몽골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삼별초의 대몽 항쟁과 최후의 투쟁
몽골과의 강화 논의가 진전되면서 무신 정권은 붕괴했다. 1259년 몽골과 고려 왕실 간에 화의가 성립되었고, 1270년 원종은 몽골의 압력과 내부의 요구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했다. 그러나 최씨 무신 정권의 무력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사병 집단이었지만, 그들 스스로를 대몽 항쟁의 주체이자 항복에 반대하는 자주 세력으로 인식했다. 삼별초는 개경 환도와 강화 조약이 몽골의 지배를 인정하는 굴욕적인 행위라고 비판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강화도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후, 남하하여 진도로 거점을 옮겼다. 진도에서 그들은 용장산성을 쌓고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며 대몽 항쟁을 이어갔다. 삼별초는 해상 활동에 능숙했기 때문에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몽골과 고려 정부의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진도는 몽골과 고려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었고, 삼별초는 다시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했다. 제주도는 삼별초의 마지막 근거지였으며, 이곳에서 그들은 군사 시설을 정비하고 몽골에 끝까지 저항했다.
1273년, 몽골과 고려 연합군은 제주도를 공격했고, 삼별초는 결국 진압되었다. 이로써 1270년부터 약 3년간 지속되었던 삼별초의 항전은 막을 내렸다. 삼별초의 최후의 투쟁은 비록 좌절되었으나, 무신 정권의 사병에서 출발하여 자주 독립 국가를 지키려는 민족적 염원을 담은 마지막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이 사건을 끝으로 고려는 몽골의 지배를 받는 원 간섭기로 접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