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의 정치와 사회 변화: 권문세족의 등장과 국력의 쇠퇴

1270년 고려 왕실이 몽골과의 강화 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는 자주적인 독립국가의 지위를 잃고 원 간섭기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고려가 몽골 제국(원나라)의 직간접적인 통제와 내정 간섭을 받으며 국력이 크게 쇠퇴한 약 100년간의 기간을 말한다. 원 간섭기는 고려 왕조의 통치 체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었으며, 이후 고려의 멸망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회적 모순을 축적하는 배경이 되었다.
원나라는 고려를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으나,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적 압력을 통해 고려 왕실을 좌지우지했다.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부마국 왕으로서 원나라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으며, 왕실 칭호와 관제 역시 격하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 속에서 원나라의 힘을 배경으로 성장한 새로운 지배층인 권문세족이 등장하여 국정을 전횡했다. 권문세족은 대규모 토지를 겸병하고 백성을 수탈하며 사회 경제적 모순을 심화시키는 주범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섭과 쇠퇴 속에서도 고려의 민족적 자주의식은 명맥을 이어갔으며, 원나라의 약화를 틈타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시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원나라의 내정 간섭 기구와 정치적 굴욕

원 간섭기 동안 고려는 심각한 정치적 굴욕을 겪었다. 첫째, 영토의 상실이다. 원나라는 동북면의 쌍성총관부(함경도), 서북면의 동녕부(평안도), 제주도의 탐라총관부 등을 설치하여 고려의 영토 일부를 직접 통치했다. 이 중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는 원나라의 군사 통치 기구였으며, 탐라총관부는 원나라의 말 사육지 및 군사 기지 역할을 했다. 이러한 영토의 분할 통치는 고려의 오랜 숙원이었던 북방 개척 의지를 꺾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둘째, 관제의 격하이다. 고려는 황제국에서 부마국으로 격하되면서 왕의 칭호는 폐하에서 전하 또는 과인으로 바뀌었고, 왕을 칭하는 묘호에도 원나라 왕실의 사위라는 의미의 충(忠)자가 붙게 되었다. 충렬왕, 충선왕 등 간섭기의 왕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앙 관제 역시 2성 6부에서 1부 4사 체제로 축소되는 등 국가 위상이 크게 낮아졌다. 이는 고려의 주권 상실을 공식화하는 조치였으며, 관료들의 자존심과 행정 효율성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셋째, 내정 간섭 기구의 설치와 다루가치 파견이다. 원나라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 정동행성(정동정벌행중서성)을 설치하여 고려의 내정을 간섭했다. 정동행성은 원래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된 임시 기구였으나, 일본 정벌이 실패한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고려의 정치를 통제하는 상설 기구로 변질되었다. 정동행성의 수장은 원나라의 황족이나 고위 관료가 맡았으며, 그 휘하의 관리들이 고려의 행정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정동행성의 이문소라는 사법 기구는 고려의 사법권까지 침해하여 고려 관리와 백성들에 대한 재판 및 처벌 권한을 행사하며 월권 행위를 자행했다. 또한 원나라 황실에서는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고려의 주요 지역에 파견하여 고려 왕과 관리들의 통치 행위를 감시하고 보고하게 했다. 다루가치는 고려의 모든 행정 업무에 간섭하며 고려 왕의 권위를 크게 위협했다.
넷째, 정치적 예속 심화이다.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왕위 계승 과정에서도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왕들은 대부분 원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원나라의 문화를 수용하는 친원적인 성향을 보였고, 이는 고려의 자주적인 국정 운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사회 경제적 수탈과 권문세족의 등장

원 간섭기는 고려 사회에 막대한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원나라는 고려에게 막대한 양의 금, 은, 인삼, 말, 포목 등의 공물을 요구했으며, 이 공물 부담은 고스란히 고려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특히 고려의 처녀들을 원나라 황실의 후궁이나 관리들의 첩으로 바치기 위한 공녀 징발은 고려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과 가족 해체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강제로 원나라로 끌려갔으며, 이 과정에서 고려 사회의 혼인 풍속까지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원나라 황실의 사냥 취미를 위해 응방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고려의 매와 사냥꾼들을 징발하여 원나라에 보내는 등 고려의 인적, 물적 자원을 끊임없이 수탈했다. 응방은 고려의 매 사육과 관리를 명분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원의 간섭과 수탈을 위한 통로로 악용되었다.

이러한 혼란과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성장한 새로운 지배층이 바로 권문세족이었다. 이들은 원나라의 통역관이나 하급 관리 출신으로 원나라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거나, 혹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한 왕실의 외척 세력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친원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원나라의 지지를 확보하고, 기존의 문벌 귀족이나 무신들이 몰락한 틈을 타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했다.
권문세족은 기존 국가 제도를 무시하고 대농장을 확대하여 농민들을 노비나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이들이 겸병한 토지는 산과 강을 경계로 삼을 만큼 광대하여 그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았다. 이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백성의 토지를 빼앗고, 심지어 노비와 양민의 신분을 불법적으로 변화시켜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만들었다. 또한 권문세족은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사병을 양성하여 지방민을 강제 동원하는 등 백성들에 대한 수탈과 폭압을 극대화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중앙 집권 체제는 더욱 약화되었으며, 국가의 재정 기반은 무너지고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한편, 이 시기에 원나라로부터 유입된 성리학은 훗날 권문세족의 비합리적인 통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원 간섭기의 문화와 성리학의 유입

원 간섭기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굴욕의 시대였으나, 한편으로는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원나라를 통해 서역의 문물이 고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원나라의 복식인 호복이나 머리 모양인 변발 등 몽골 풍속이 고려의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했다. 비록 이러한 풍습은 자주적인 문화가 위축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지만, 만두나 소주 등 일부 음식 문화가 이 시기에 고려에 정착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는 원나라를 통해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고려에 유입되었다. 안향은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들여와 이를 보급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그의 학통을 이은 백이정, 우탁 등의 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은 고려 후기 학문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성리학은 기존의 불교와 권문세족의 사상적 기반인 훈고학적 유교를 비판하며, 인간의 본성과 사회 질서에 대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제공했다. 성리학은 훗날 신진사대부가 권문세족의 비리를 비판하고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한편, 굴욕적인 상황은 오히려 고려 사람들의 민족적 자주의식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편찬했는데, 이들은 단군 조선을 시조로 삼아 중국사와 대등한 입장에서 고려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민족의식과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고취시켰다. 특히 삼국유사는 불교적 설화와 민간 전승을 기록하여 당시 지배층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민족 고유의 문화를 담으려 노력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와 신진사대부의 성장

원 간섭기의 모순이 심화되고 14세기 중반 원나라가 홍건적의 난 등 내부적인 혼란과 쇠퇴기에 접어들자, 고려의 공민왕은 장기적인 반원 자주 정책과 내부 개혁을 추진할 기회를 얻었다. 원나라에 대한 예속을 끊으려 했던 공민왕은 가장 먼저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하고, 정방을 혁파하여 권문세족이 장악했던 인사권을 회수하려 했다. 또한 무력으로 원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여 잃었던 북방 영토를 되찾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 쌍성총관부 탈환에 공을 세운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민왕은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 전민변정도감은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민으로 해방시키는 토지 및 노비 제도의 개혁을 담당했다. 이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강력한 개혁이었으며, 일시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어 민생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과 신돈의 숙청, 그리고 공민왕 본인의 시해 사건 등으로 인해 개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이 시기에 권문세족의 전횡에 맞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은 지방의 향리 출신이나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로, 성리학의 대의명분론을 바탕으로 권문세족의 비리를 비판하고 왕도 정치의 구현을 주장했다. 이들은 공민왕의 개혁을 지지하거나 참여했으며, 이후 우왕, 창왕 대에 이르러 이성계를 중심으로 급진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로 나뉘어 고려 말 정국을 주도하며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공민왕의 개혁은 원 간섭기를 극복하고 고려의 자주권을 회복하려 했던 마지막 시도였으며, 신진사대부에게 개혁의 불씨를 남겼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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