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 계층의 시대: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세습 특권
고려 중기는 문벌 귀족 사회가 확립된 시기였다. 광종과 성종을 거치며 중앙 집권 체제가 안정되고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 과거 제도를 통해 성장한 유교적 관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혈연과 가문을 기반으로 권력을 세습하는 지배 계층으로 변모했다.
이들 문벌 귀족은 중앙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음서제와 공음전이라는 특권을 통해 그 지위와 부를 자손들에게 대물림했다. 특히 왕실과의 혼인은 문벌 귀족이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사회적 명예를 독점함으로써 사실상 폐쇄적인 신분 계층을 형성했다.
문벌 귀족 사회는 고려를 유교적 문치주의 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그들이 독점하는 폐쇄적인 특권은 결국 관료 사회 내부에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는 이 시기는 고려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동시에 상징했지만, 그 이면에는 특권층의 권력 독점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폐단은 중앙 정치를 문벌 귀족들의 사적인 이해관계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문벌 귀족의 기반: 음서제와 공음전
문벌 귀족의 성립과 유지는 그들이 누린 두 가지 핵심적인 세습 특권, 즉 음서제와 공음전에 의해 가능했다. 음서제는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오직 가문의 배경만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제도였다. 5품 이상의 고위 관료 자제는 자동적으로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으며, 이는 능력 중심의 과거제를 통해 진출한 문벌 귀족들이 스스로의 지위를 폐쇄적인 방식으로 유지하려는 제도적 장치였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자제들은 시간이 지나 과거 출신 관료들보다 오히려 더 높은 요직을 차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음서제는 관직 진출의 문턱을 낮추어 귀족 자제들이 쉽게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보장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해 진출한 신진 관료들보다 더욱 빠른 승진 기회와 유리한 보직을 차지함으로써 중앙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군림했다. 이들은 행정 실무보다는 주요 정책 결정 기구인 재추(재신과 추밀) 회의에 집중적으로 포진하며 국가 운영의 방향을 결정했다.
공음전은 문벌 귀족의 경제적 특권을 상징하는 제도였다. 이 역시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에게 지급되었던 토지로, 일반적인 전시과와 달리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사망해도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는 세습적인 토지였다. 공음전은 문벌 귀족들에게 세습적인 경제 기반을 제공하여, 관직을 잃더라도 가문의 부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공음전 외에도 이들은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직역 대가인 전시과와 녹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음서제를 통해 확보된 정치적 지위와 공음전을 통해 확보된 경제적 기반은 서로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문벌 귀족 가문이 수 세대에 걸쳐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견고한 시스템을 완성했다. 이 두 제도는 고려 중기 사회를 지배하는 폐쇄적인 귀족제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다.
권력 유지 방식: 왕실과의 혼인과 가문 간 연합
문벌 귀족이 권력을 유지하는 또 다른 핵심적인 방식은 왕실과의 독점적인 혼인 관계였다. 특정 문벌 가문들은 대대로 왕의 외척이 되거나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등에 업고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이들은 왕의 외조부나 장인으로서의 지위를 활용하여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친인척을 요직에 배치하여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왕실은 문벌 귀족 세력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인주 이씨 가문이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여 대대로 왕비를 배출했으며, 이자겸 때에 이르러서는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외척 세력의 등장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광종과 성종의 의도와는 달리, 왕권이 문벌 귀족 세력에 의해 제한되는 결과를 낳았다. 왕은 고립되었고, 심지어 왕위 계승에도 문벌 귀족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문벌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도 폐쇄적인 혼인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다른 가문과 공유하지 않기 위해 고위 관료 가문끼리만 혼인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굳건히 지켰다. 이러한 혼인 연합은 특정 가문이 일시적인 정치적 위기를 겪더라도 다른 유력 가문의 지원을 통해 세력을 회복할 수 있는 안전망 역할을 했다. 이러한 가문들은 성씨를 기준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었으며, 혼인 대상은 소수의 문벌 가문으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폐쇄적인 연합과 왕실 외척 독점은 문벌 귀족 사회를 다른 신진 세력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문벌 귀족이 중앙의 주요 권력을 장악하면서, 지방의 향리들은 중앙 정치 진출이 사실상 차단되었고, 그들만의 독자적인 세력 범위 내에 머물게 되었다.
문벌 귀족 사회의 문화적 영향과 내재된 갈등
문벌 귀족들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문신 계층이었기 때문에, 고려 사회에 문치주의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고, 개경을 중심으로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웠다. 이 시기에 발달한 고려청자는 문벌 귀족의 세련된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들은 또한 법과 제도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 고려의 중앙 집권적인 행정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기반을 제공했다. 유교적 경전과 문학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 사회의 안정과 번영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폐쇄적인 특권 세습은 과거제를 통해 능력을 인정받고자 했던 신진 관료나 지방 출신 인사들에게 큰 불만을 야기했다. 이들은 노력과 실력만으로는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구조에 좌절했으며, 이는 관료 사회 내부에 점진적인 불평등과 분열을 초래했다.
특히 왕실 외척을 독점하며 권력을 전횡하던 인주 이씨 이자겸의 전횡은 이러한 모순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외손자인 인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고 국정을 마음대로 농락했다. 이에 왕권 강화를 꿈꾸던 인종과 그를 지지하는 일부 신진 세력은 이자겸의 난을 일으키며 문벌 귀족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이 난은 개경 도성이 불타고 왕궁이 파괴되는 등 고려 중기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자겸의 난 진압 이후에도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같은 근본적인 개혁 시도가 뒤따랐다.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은 고려 중기의 안정적인 토대였으나, 그 폐쇄성과 특권 독점은 결국 다음 시기인 무신 정권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정의 씨앗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