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후예들: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과 해동성국을 일군 통치 시스템의 혁신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 지역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합하여 건국한 나라로, 우리 민족사의 북방 계승을 상징하는 중요한 국가입니다. 발해가 단순히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민족적 당위성을 넘어, 혼합된 민족 구성을 어떻게 독자적인 통치 시스템으로 통합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는지에 대한 심층 분석을 제공합니다.
특히 발해 건국 시조인 대조영이 당나라가 설치한 안동도호부의 견제를 극복하고 영주(營州)를 떠나 만주 동부의 길림성 일대에 자리를 잡은 전략적 선택과 과정을 조명합니다.
발해의 통치 체제는 당의 삼성육부(三省六部)를 모방했으나, 그 명칭과 운영 방식에 고구려적인 독자성을 부여하여 자주성을 확보했습니다. 이러한 선진 시스템의 혁신적인 수용과 변형이 발해가 주변국과 대등한 국제 관계를 유지하고 멸망 이후까지 영향을 미치는 해양 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발해의 역사는 고구려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이어받아 남북국 시대라는 독특한 역사적 시공간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한국사에서 대륙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대조영의 건국 전략: 고구려 유민 규합과 국제적 고립 타개

발해 건국 시조인 대조영은 고구려 멸망 후 당의 영주(營州)에 포로로 잡혀 있던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습니다. 대조영의 발해 건국은 단순히 영웅적인 독립 운동을 넘어, 당의 통제 시스템 내에서 조직된 치밀한 이주 전략과 반당(反唐) 세력 규합의 결과였습니다.
대조영은 거란족과 말갈족이 당에 반기를 든 혼란기를 이용하여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말갈족의 강력한 군사력과 고구려 유민의 선진 문화 및 행정 능력이 결합되었는데, 이는 발해라는 새로운 국가가 가진 다민족 연합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특성을 형성했습니다.

발해 건국 초기, 당나라는 발해를 말갈족의 일파로 격하하며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조영은 '진(震)'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독자적인 연호 '천통(天統)'을 사용함으로써 당과의 대등한 위치를 천명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지방 세력이 아닌 자주적인 황제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외교적 행위였습니다.
발해는 초기부터 돌궐과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당을 견제하는 삼각 외교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특히 발해 무왕 대에 이르러 장문휴를 시켜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한 사건은 발해가 당의 대규모 원정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당과 대등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인정받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조영의 건국 과정은 당의 지배 아래 있던 유민 집단이 국제적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독립을 쟁취하고, 고구려 계승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며 외교적 고립을 타개한 뛰어난 전략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해동성국 건설의 비밀: 삼성육부의 독자적 변용과 행정 시스템

발해가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해동성국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핵심 기반은 바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통치 시스템이었습니다. 발해는 당의 선진적인 관료 제도를 받아들였으나, 이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발해의 실정에 맞게 혁신적으로 변용했습니다.
중앙 관제인 삼성육부(三省六部)는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지만, 왕권의 강화를 위해 당의 중서성과 문하성을 정당성 아래 통합하고, 최고 관직인 대내상(大內相)을 두어 왕권을 보좌했습니다. 또한 육부의 명칭을 충(忠), 인(仁), 의(義), 지(智), 예(禮), 신(信)과 같은 유교 덕목을 사용하여 발해만의 통치 철학을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발해의 지방 행정은 5경 15부 62주로 구성되어, 다민족 사회의 통합과 지역 특산물 관리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특히 상경용천부를 비롯한 5경은 수도 기능, 군사적 거점, 대외 교역의 중심지라는 다중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효율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상경용천부의 주작대로와 바둑판식 도시 구조는 당의 장안성을 참고했으나, 궁궐 배치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따르는 등 융합적 건축 문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적 완성은 고구려 유민의 숙련된 행정 능력과 말갈족이 제공하는 군사적, 노동력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발해의 통치 시스템은 당의 형식을 빌려 국제적 기준을 충족시키면서도, 고구려적 자주성과 민족적 특수성을 확보한 성공적인 통합 모델이었습니다.

국제 질서 속의 균형추: 무왕과 문왕 시대의 대외 정책과 해상 네트워크

발해는 광활한 영토를 바탕으로 당, 신라, 일본, 거란, 돌궐을 아우르는 복잡한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균형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무왕(대무예) 시대에는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쳐 당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고, 앞서 언급된 등주 공격을 통해 발해의 군사적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이어 문왕(대흠무) 시대에는 당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며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실리 외교로 전환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무력과 외교라는 두 가지 수단을 적절히 사용하여 국익을 극대화했음을 보여줍니다.

발해는 특히 일본과의 외교에 공을 들였습니다.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동맹을 발해와 맺었습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 칭한 기록은 발해가 대외적으로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또한, 발해는 동해와 남해를 잇는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였습니다. 5경 중 하나인 남경남해부는 신라와의 교역을 담당하는 중요한 해상 거점이었으며, 이는 발해가 대륙 국가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해양 세력이었다는 점을 증명합니다. 발해의 멸망은 단순히 거란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복잡했던 국제 질서의 변화와 내부적인 민족 구성의 모순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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